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한민국의 역사왜곡 (문단 편집) ==== [[조선]]·[[대한제국]] ==== * [[간도]] 조선 영토설 못해도 분쟁지역이라고는 볼 수 있겠지만 간도가 분쟁지역화 된건 대한제국 시절이며 조선의 영토라고 볼 수는 없다. * [[대한제국]] 국력 과장/축소 대한제국이 명실상부한 근대 국가이며, 당시 동아시아에서 [[일본제국]]과 대등한 국력을 가졌고 [[간도]]를[* 간도를 어느 정도 확보했던 것은 사실이나 1년뿐이다.] 식민지로 삼아 통치했다는 주장. 이 경우는 [[자학사관]] 및 [[식민사관]]의 영향으로 지나치게 저평가되던 대한제국이 재평가되면서 지나치게 부풀려진 특이한 케이스이다. 대한제국이 대중의 인식에 비해서는 근대 국가에 어느정도 근접했고, 러시아와 일본이 너무 강력해서 그렇지 소국으로서 갖출 정도의 국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 [[고종(조선)|고종]] 개혁군주설 서울대 명예교수 [[이태진]]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고종 황제 무능설은 일제가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고종을 '자주독립을 지향하던 개혁군주'로 규정한다. [[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210324/106046026/1|#]] 하지만 고종은 임금체납과 [[군납비리]]를 저지른 [[민겸호]]를 처벌하지 않았고, 외국 군대를 끌여들였으며, [[동학농민운동]] 때도 청나라군을 불러왔다. 거기다 매관매직을 당연시했다. 궁궐짓기와 무속인 총애로 인한 낭비는 일관적으로 지적되며 동학운동의 도화선이 된 고부군수 조병갑을 난이 일어날때 파직했다가 고종이 복직 시켜서 고등재판소 판사로 복귀해서 동학교주 최시형에게 사형선고를 내린다. 이처럼 이태진 교수의 조선 경제사 특히 강남농법 도입과 관련한 연구는 반대측 진영에서도 연구 업적을 높이 평가하지만 고종에 관한 연구는 학계에서 긍정적 연구와 부정적 측면만을 강조하는 연구가 대립하고 있다.[* 일단 고종이 광무개혁을 주도하였고 광무개혁이 성과를 거둔 것은 정설로 인정된다.] * [[고종(조선)|고종]] 매국노설 위 설과 반대로 이는 고종을 폄하하는 역사왜곡이다. 고종은 애초에 한일합병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을사늑약]]과 [[정미7조약]]은 물론 [[한일의정서]]부터 반대했던 인물이다. 고종은 내탕금을 신무기 구입, 전기 및 전화 설치, 은행 설립, 제중원 건립 등에 사용하였으며 [[광무개혁]]으로 근대화를 이루고 신분제를 폐지하고 김구의 사형을 막고 대한독립의군을 창설하고 황제직속 정보기관 제국익문사를 창설하여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고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지원하였으며 을사조약에 대항하여 헤이그에 특사를 보냈으며 안중근의 사형을 막으려 하고 합병 후 여러번 망명을 시도하였다. 8번째 망명 시도중 사망했는데 일제의 독살이라는 의혹이 존재한다. 당시 이 독살설에 분노한 백성들이 3•1 운동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 설은 고종이 사실 일본의 통치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고 왜곡한다. 우선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jh&levelId=jh_022r_0130_0490&types=r|주한일본공사관 문서]]와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1073270|고종의 대내외정세 인식에 대한 논문]]을 통해 이를 반박할 수 있다. 이 문서에 따르면 고종은 한일 의정서는 물론이거니와 일본의 통치에 굉장히 마음에 안들어함을 알 수 있다. 물론 고종이 유능한 군주는 아니었던 것은 사실이나, 국왕으로서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는 확실히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해당 주장의 대표적인 서적으로 [[조선일보]] 박종인 기자의 <매국노 고종>이 있다. * [[이준(열사)]] 사망 원인 왜곡 이준 열사가 헤이그에서 1907년 7월 15일 순국하고 나서 대한매일신보 와 황성신문에서 각기 이준열사가 할복을 하고 피를 지나가는 사람에게 뿌리기 까지 했다고 보도 했으나 당시 민족 감정을 고취시키기 위한 가짜 뉴스였고 이미 해방후에 국사편찬위원회가 1956년과 1962년 이준의 죽음을 분사(憤死)로 정리하였다. 이준 열사는 이미 종기를 앓고 있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